벨직신앙고백서는 남부 네델란드(화란)의 벨기에 지역에서 귀도 드 브레(Guido de Bres)에 의해서 작성된 것이다. 특히 화란은 1618년에 도르트 총회를 개최하는 중요한 개혁교회의 요충지었기 때문에 더욱 관심을 끌고 있다. 이런 세계적인 개혁교회의 총회가 집행 될 수 있었던 것은 이미 이 지역의 교회들이 사도적이고 어거스틴적이며 또한 칼빈주의적인 개혁신앙을 뿌리깊게 받아들이고 정립했기 때문임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1561년에 이미 이 화란에서는 개혁교회에서 공적으로 인정받게 된 본 신앙고백서를 작성할 정도로 깊은 신학적 내용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인 것이다. 또한 16-17세기를 거치면서 유럽의 혼란한 정치, 종교적인 배경 속에서 많은 개혁신학자들이 화란으로 이주해 오면서 화란은 보다 더 철저한 개혁신앙을 정립하게 되었던 것이다.

먼저 정치적인 배경으로는 찰스 5세가 공적으로 이단(개혁교회)을 처형하는 칙령을 발표하고 대대적으로 개혁교회의 성도들을 핍박하기 시작한 역사를 살펴볼 수 있다. 이미 1523년에 어거스틴파의 수도승이었던 헨리 보에스(Henry Voes)와 요한 에쉬(John Esch)는 브리쉘에서 말뚝에 묶여 화형을 당하는 순교의 역사가 화란에 있었다. 이들은 죽어 가면서도 “사도신경”과 “Te Deum”을 부르며 죽어 갔던 역사는 개혁교회에 있어서 신앙고백서를 채택하고 지켜간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정신인지를 깨닫게 한다. 이런 핍박의 역사는 스페인의 필립 2세에 와서는 더욱 심해져서 그 절정을 이루기도 했다. 그러나 하나님의 섭리는 이런 핍박 속에서 화란의 많은 개혁교회들이 독립교회를 세우는 열매들을 낳게 하였다. 이와 같은 순교의 역사를 가지고 있는 본 신앙고백서는 아드리안드 사라비아(Adrien de Saravia)와 모데투스(Modetus)와 윙켄(G. Wingen)의 도움을 받아서 가이오 드 브레(Guido de Bres)가 프랑스어로 작성한 것인데, 후에 엔트웝의 왈룬(Walloon)과 보르쥬(Bourges)의 프렌시스 쥬니우스(Francis Junius)에 의해서 좀더 분명한 칼빈주의적 정신이 포함된 형태로 완성되었다.

본 신앙고백의 가치는 개혁주의 교회 안에서도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것을 확인 할 수 있다. 왜냐하면 본 신앙고백서는 1566년의 엔트웹 회의와 1568년 베셀 회의에서 공식적으로 채택이 되고 보다 더 공적으로 채택이 된 것은 1571년 엠덴 총회와 전국 도르트 총회(1574), 미델부르그 총회(1581)와 1618-1619년에 있었던 도르트회의에서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과 함께 개혁교회의 중요한 신앙고백으로 채택되기도 하였던 것이다. 특히 도르트 총회에서는 이 신앙고백서를 개혁교회의 규범 교리의 하나로서 채택하였고, 모든 교회의 책임자는 반드시 이에 서명하도록 규정하였다. 이렇게 됨으로 본 신앙고백서는 개혁교회에서 중요한 신앙고백서로 자리를 잡게 되었던 것이다.

또한 1584년에는 로마교회의 광신자에 의해 암살을 당한 윌리암 오렌지(William Orange)공은 자신의 둘째 아들과 투쟁을 벌이면서 성경과 함께 벨직 신앙고백서와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을 영적인 안내자와 위로자로 삼고 원수들의 공격을 맞서 나가기도 했다. 이처럼 하나님 이외에는 아무도 두려워하지 아니하는 칼빈주의 사상은 스페인의 정치적, 종교적 독재와 맞서 승리를 얻게 하는 중요한 정신이기도 했던 것이다. 이처럼 본 신앙고백서는 화란의 교회와 정치, 사회의 모든 부분에 걸쳐서 깊은 영향력을 끼쳤던 것을 알 수 있다.

신앙고백서의 역사를 살펴보면서 한 가지 매우 놀라운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이미 신조의 채택과 표명이 성경의 참된 의미를 드러내고 지키는 것으로서의 표현이었기에 이것을 포기하고 타협하는 것은 곳 성경의 참된 진리를 포기하고 타협하는 것으로 이해했기에 목숨을 걸고 순교할 수 있었음을 보았다. 그런데 이것과 함께 벨직 신앙고백서의 역사를 통해서 발견하게 되는 오렌지공이 자신의 아들과 신앙적인 표명의 차이 때문에 부자지간의 인연을 정리하는 엄격한 신앙의 정신을 보게 되는 것이다.

특히 그가 마지막까지 투쟁하면서 그의 힘의 원천과 위로로 삼았던 것은 성경과 함께 본 신앙고백서였음을 보면서 우리는 객관적인 신앙고백의 기준을 어떻게 고백하고 드러내는가에 따라서 때로는 가족과도 분리하면서 까지도 이 신앙적 가르침과 그 정신을 지켜가야 하는 것이 성경과 신앙고백서의 역사임을 알 수 있다. 그만큼 신조를 채택하고 표명하는 것은 포기할 수 없는 신앙적 내용임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신앙에 대한 엄밀한 정신은 이미 예수님께서 다음과 같이 제시해 주고 있는 말씀을 통해서 우리에게 잘 드러나고 있다.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여기에서는 우리는 인본주의가 결코 끼어들 수 없는 거룩한 신본주의적 신앙의 영광을 보게 된다.

그리고 본 신앙고백서도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과 함께 알미니안주의 자들에 의해서 강력한 도전을 받으면서 1618년 도르트 회의 당시에 수정을 강력하게 요구받았다. 왜냐하면 본문에는 철저한 개혁교회의 신앙 정신이 잘 제시되고 있기 때문에 인간의 자유의지를 강조하는 알미니안주의 입장에서는 여러 가지로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도르트 총회에서는 오히려 이 벨직 신앙고백서을 더욱 높이 평가하고 프랑스, 라틴어, 화란어 개정판을 출판하게 되었다. 즉 알미니안주의 자들에 의해서 강력한 수정을 요구받았지만 이를 거절하고 다른 방향의 수정을 채택하였다. 그것은 문화적이고 사회적인 수정 정신이 아니라 철저한 칼빈주의 신학자들의 손을 거치면서 보다 더 성경의 의미를 드러낼 수 있는 형태로 제시되었던 것이다. 초판본은 1562년에 나왔으며, 후에 1669년에 개정판이 나왔으며 1787년, 1850년에도 제시되었다. 그리고 라틴어 판은 1581, 1612년 판이 있다.

우리 모두는 오직 단일하고 영적인 존재이신 한 분 하나님, 곧 영원하고, 불가해하며, 보이지 않고, 불변하며, 무한하고, 전능하며, 완전히 지혜롭고, 공의로우며, 선하고, 모든 선이 흘러나오는 원천이신 하나님이 계신 것을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고백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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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두 가지 방편으로 하나님을 알 수 있는데, 첫째는 우주의 창조와 보존과 통치를 통해서입니다. 이는 사도 바울이 로마서 1장 20절에서 말하는 것처럼, 우주는 한 권의 아름다운 책과 같이 우리 눈앞에 있고, 그 안에 있는 모든 크고 작은 피조물들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한 능력과 신성을 생각하게 만들어주는 활자와도 같아서 이 모든 것들은 사람들을 정죄하고 핑계할 수 없도록 하기에 충분하기 때문입니다. 둘째, 하나님은 하나님의 영광과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금생에서 우리에게 필요한 만큼 그의 거룩하고 신적인 말씀을 통해 더욱 분명하게 자신을 알리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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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하나님의 말씀은, 베드로가 말하는 것처럼, ‘사람의 뜻으로’ 주어지거나 전달된 것이 아니라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입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을 우리는 고백합니다. 그 후에 하나님은 우리와 우리의 구원을 위한 특별한 돌보심으로써 그의 종들, 곧 선지자들과 사도들을 명하셔서 이 계시된 말씀을 기록하도록 하셨으며, 하나님께서도 친히 자신의 손가락으로 율법의 두 돌판을 기록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러한 기록들을 거룩하고 신적인 성경이라고 부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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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성경이 두 부분, 즉 구약과 신약으로 되어 있으며 이것들이 정경이라는 사실에 그 어떤 이의도 있을 수 없다고 믿습니다. 하나님의 교회에서 이 책들의 목록은 다음과 같습니다:
구약성경으로는 모세오경인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와; 여호수아, 사사기, 룻기, 사무엘상하, 열왕기상하, 역대상하, 에스라, 느헤미야, 에스더; 욥기, 다윗의 시편과 솔로몬의 세 책인 잠언, 전도서, 아가; 네 권의 대선지서인 이사야, 예레미야(예레미야 애가 포함), 에스겔, 다니엘; 그리고 나머지 열 두 권의 소선지선인 호세아, 요엘, 아모스, 오바댜, 요나, 미가, 나훔, 하박국, 스바냐, 학개, 스가랴, 말라기입니다.
신약성경으로는 사복음서인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 요한복음과; 사도행전과; 바울의 열 네 서신인 로마서, 고린도전후서, 갈라디아서, 에베소서, 빌립보서, 골로새서, 데살로니가전후서, 디모데전후서, 디도서, 빌레몬서, 그리고 히브리서; 다른 사도들의 일곱 서신인 야고보서, 베드로전후서, 요한1,2,3서, 유다서; 그리고 요한계시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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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이 모든 책들을, 그리고 오직 이 책들만을 우리의 믿음을 규정짓고 세우고 굳세게 하는 거룩한 정경으로 받아들입니다. 우리가 이 책들에 담겨진 모든 것을 아무 의심 없이 믿는 것은, 교회가 그것들을 정경으로 받아들이고 승인하기 때문이어서라기보다는, 무엇보다 이 책들이 하나님에게서 온 것임을 성령님께서 우리 마음에 증거하시기 때문이며, 또한 이 책들 스스로가 하나님에게서 온 것을 입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맹인이라도 이 책들에서 예언된 것들이 성취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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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이 거룩한 책들을 외경들, 즉 에스드라3,4서, 토빗서, 유딧서, 지혜서, 집회서(시락서), 바룩서; 에스더서의 부록, 풀무불 속의 세 청년의 노래, 수산나; 벨과 용, 므낫세의 기도, 마카베오상하서와 구별합니다. 교회는 이 책들이 정경에 일치하는 한에서만 이 책들을 읽고 거기에서 교훈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외경은 우리가 그 증거를 토대로 믿음이나 기독교 신앙의 내용을 확증할만한 그 어떤 권위나 효력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또한 이 외경은 거룩한 책들의 권위를 손상시키는 데 사용될 수는 더더욱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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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이 성경이 하나님의 뜻을 완전하게 담고 있고, 사람이 구원을 받기 위해 믿어야 할 모든 것을 그 속에서 충분히 가르치고 있다고 믿습니다. 성경에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섬김(service, 또는 예배)의 모든 방식이 매우 길고 상세히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누구라도-사도 바울이 말한 것처럼, 사도나 심지어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고 할지라도- 성경이 우리에게 이미 가르친 것과 다르게 가르쳐서는 안 됩니다(갈 1:8). 하나님의 말씀에 무엇이든 가감하는 것을 금지하신 사실은(신 12:32; 계 22:18-19) 성경이 모든 면에서 완전하고 완성된 것임을 분명하게 입증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람의 글들을-그 저자들이 얼마나 거룩한 자들이었는지와 관계없이- 신성한 성경과 동등한 것으로 생각하면 안 되며, 관습이나 다수성(majority)이나 고대성(age)이나, 시대와 사람의 계승이나, 공회나 교령(decrees)이나 공적 결정들을 하나님의 진리 위에 두지 말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진리는 모든 것 위에 있으며, 모든 사람은 본성상 거짓되며 입김보다 가볍기 때문입니다(시 62:9). 그러므로 우리는 사도들이 우리에게 가르친 대로, 이 무오한 규범에 일치하지 않는 모든 것들을 전심으로 거절합니다. 사도들은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분별하라”(요일 4:1)고 하였고, “누구든지 이 교훈을 가지지 않고 너희에게 나아가거든 그를 집에 들이지도 말고 인사도 하지 말라”(요이 1:10)고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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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이 진리되는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하나의 단일 본질이신 한 분 하나님을 믿으며, 그 안에는 삼위의 고유한(incommunicable, 공유할 수 없는) 특성에 따라 실제로, 참으로 그리고 영원히 구별되는 세 위격, 곧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계신 것을 믿습니다. 성부는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만물의 원인과 근원과 시초이십니다. 성자는 말씀과 지혜이시며, 성부의 형상이십니다. 성령은 성부와 성자로부터 나오시는 영원한 능력이자 권능이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구별이 하나님을 세 분으로 나누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각자의 특징들로 구별되는 실재(subsistence, 실체)를 가진다는 것과, 이 삼위는 그런 방식으로 유일한 한 분 하나님이심을 우리에게 가르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성부는 성자가 아니고, 성자는 성부가 아니며, 마찬가지로 성령은 성부나 성자가 아니신 것이 분명합니다. 이 삼위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분은 되며, 하지만 나누어지거나 뒤섞이거나 혼합되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성부는 육신을 취하지 않으셨고 성령도 육신을 취하지 않으셨으며, 오직 성자만이 (육신을) 취하셨기 때문입니다. 성부는 성자가 없이 계신 적이 없고, 성령이 없이 계신 적도 없었으니, 이는 삼위 모두가 하나의 동일한 본질 속에서 영원히 동등하시기 때문입니다. 또한 여기에는 (삼위 간의) 우선이나 마지막이 있을 수도 없으니, 이는 삼위 모두가 진리와 능력과 선하심과 자비하심에 있어서 하나이시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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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이 모든 것을 성경의 증거를 통해서 알 뿐만 아니라, 특별히 우리 안에서 감지할 수 있는 삼위의 활동을 통해서 압니다. 이 거룩한 삼위일체 하나님을 믿도록 우리를 가르치는 성경의 증거들은 구약성경의 많은 곳에 기록되어 있지만, 이를 일일이 열거하는 것은 불필요하며, 다만 신중하게 몇 구절을 선택하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창세기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자.” 그리하여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습니다(창 1:26-27), 또한 “보라,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 같이 되었으니”(창 3:22)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가 사람을 만들자”라고 하신 말씀을 볼 때 하나님의 신격(Deity, 본체) 안에 복수(plurality)의 위격이 계시다는 것이 드러나며, 그 후에 “하나님이 창조하셨다”고 하신 말씀을 볼 때 하나님의 한 분이신 것이 드러납니다.
하나님은 여기에서 얼마나 많은 위격들이 있는지 말씀하지 않으신 것이 사실이나, 구약에서 우리에게 어느 정도 뚜렷하지 않던 것이 신약에서 매우 뚜렷하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주님께서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으실 때,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마 3:17)라는 성부의 음성이 들렸으며, 성자가 물에서 올라오셨고, 성령은 비둘기 같은 형상으로 나타나셨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믿는 자들에게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마 28:19) 세례를 베풀라고 명령하셨습니다. 누가복음에서는 천사 가브리엘이 우리 주님의 모친 마리아에게 “성령이 네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너를 덮으시리니, 이러므로 나실 바 거룩한 자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어지리라.”(눅 1:35)고 말했습니다. 또한 성경 다른 곳에서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지어다.”(고후 13:13)라고 말씀하였습니다. 이 모든 성경 구절들에서 우리는 하나의 유일한 신적 본질 안에 세 위격이 있다는 것에 관하여 충분히 가르침을 받습니다.
비록 이 교리가 모든 인간의 이해를 훨씬 넘어 선다 하더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장차 하늘에서 이것을 충만하게 알고 누리게 될 것을 기다리면서, 지금 우리는 말씀에 근거하여 이 교리를 믿습니다. 더 나아가 우리는 우리와 관계하여 이 삼위의 특별한 사역들과 활동들에 주목해야 합니다. 성부는 그의 능력으로 인해 우리의 창조주로 불리고, 성자는 그의 피로 인해 우리의 구주와 구속주로 불리며, 성령은 우리의 마음에 거하심으로 인해 우리를 거룩하게 하시는 분(our Sanctifier)으로 불립니다. 이 거룩한 삼위일체 교리는 사도 시대부터 오늘날까지 참 교회에서 늘 유지되어 왔으며, 유대인들, 무슬림들, 그리고 경건한 교부들에 의해 정당하게 정죄된 마르시온, 마니, 프락세아스, 사벨리우스, 사모사타의 바울, 아리우스 등과 같은 거짓 그리스도인들과 이단들을 논박하여 왔습니다. 그러므로 이 교리 안에서 우리는 세 가지 보편 신조(ecumenical creeds), 곧 사도신경, 니케아 신경, 그리고 아타나시우스 신경뿐만 아니라, 고대 교부들이 이 신조들과 일치하여 결정한 것들을 기꺼이 받아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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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의 신성을 따라 영원히 나신 하나님의 독생자이신 것과, 그는 지음을 받거나 창조된 분이-그렇다면 그는 피조물이 되시기에- 아니신 것을 믿습니다. 그는 성부와 동일 본질이시며, 동일하게 영원하며, 성부의 본체의 형상이시며,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이시며(히 1:3), 모든 것에서 성부와 동등하십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본성을 취하신 때에 비로소 하나님의 아들이 되신 것이 아니라 영원에서부터 하나님의 아들이시니, 다음의 (성경의) 증거들이 서로 연결되어 이 진리를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모세는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창 1:1)라고 말하고 있고, 요한은 말씀 곧 그가 하나님이라고 불렀던 그 말씀으로 말미암아 만물이 창조되었다고 말합니다(요 1:1-3). 사도는 “하나님이 그의 아들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다”(히 1:2)라고 하며, 또한 만물이 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창조되었다고 말합니다(골 1:16). 그러므로 하나님, 말씀, 아들, 예수 그리스도라고 불리는 그분은 만물이 그분에 의해 창조되었던 그때 이미 존재하고 계셨음이 분명합니다. 그러므로 선지자 미가는 그리스도의 근본은 “상고부터”라고 말합니다(미 5:2). 또한 사도는, 아들은 “시작한 날도 없고 생명의 끝도 없다”(히 7:3)고 말합니다. 따라서 그분은 우리가 기도하고 예배하며 섬기는 전능하신 하나님, 곧 참되고 영원하신 하나님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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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성령님께서 영원히 성부와 성자로부터 나오신다는 것을 또한 믿고 고백합니다. 그분은 지음을 받거나 창조되거나 나시지 않았으며, 다만 성부와 성자로부터 나오시는 분입니다. (삼위의) 순서에 있어서는, 성령님은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것처럼 삼위일체의 세 번째 위격으로서, 성부와 성자와 함께 하나의 동일한 본질과 위엄과 영광을 가지신, 참되고 영원한 하나님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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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성부께서 보시기에 좋으신 때에, 아무 것도 없는 중에서 하늘과 땅과 모든 피조물들을 말씀으로 곧 그의 아드님으로 말미암아 창조하신 것과, 모든 피조물에게 그 존재와 형태와 모양을 주시고, 또한 다양한 기능을 주셔서 그들의 창조주를 섬길 수 있도록 하신 것을 믿습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그의 영원한 섭리와 무한한 능력을 따라 모든 피조물을 계속 붙드시고 다스리심으로, 만물은 사람을 섬기도록 하시고 사람은 하나님을 섬기도록 하시는 것을 우리는 믿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또한 천사들을 선하게 창조하셔서, 그들이 하나님의 사자(使者, messengers)들이 되도록, 또한 택하신 자들을 섬기도록 하셨습니다. 그 천사들 중 일부는 하나님께서 그들을 창조하실 때에 주신 그 고귀한 지위에서 영원한 파멸로 떨어졌지만, 나머지 천사들은 하나님의 은혜로 그들의 처음 지위를 계속 유지하며 그 지위에 머물러 있습니다. 마귀들과 악령들은 심히 부패하여 하나님과 모든 선한 것들의 원수가 되었습니다. 그들은 그들의 전력을 다해서 악한 계략으로 교회와 교회의 모든 지체들을 다 무너뜨리고 변질시키기 위하여 마치 강도들처럼 숨어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런 이유로 그들은 자신들의 악을 인하여 영벌을 선고 받아 날마다 끔찍한 고통을 기다립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영들과 천사들의 존재를 부정하는 사두개인의 오류를 거부하며, 또한 마귀들은 창조된 것이 아니라 그들의 독자적인 기원을 가지며 부패된 적이 없이 그들의 본성상 악하다고 말하는 마니교의 오류를 혐오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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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이 선하신 하나님께서 만물을 창조하신 후에 만물을 운명이나 우연에 맡겨두지 않으시고 그의 거룩하신 뜻대로 그들을 인도하시고 다스리시는 것과, 그의 명령이 없이는 이 세상에서 어떤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을 믿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일어나는 죄의 조성자(author)가 아니시며, 죄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할 분도 아니십니다. 하나님의 권능과 선하심은 너무나도 위대하고 측량할 수 없기에, 하나님은 가장 탁월하고 정의롭게 그의 사역을 미리 정하시고 시행하시며, 심지어 마귀와 악인들이 불의하게 행할 때도 그러하십니다. 우리는 사람의 이해를 초월하여 일하시는 하나님의 역사에 대하여 부당한 호기심을 가지고 우리의 능력이 허락하는 이상으로 묻기를 원치 않습니다. 다만 우리는 모든 겸손과 경외심으로 우리에게 감추어져 있는 하나님의 의로우신 판단을 찬송할 뿐이며, 하나님이 그의 말씀에서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것들만을 배우고 말씀의 경계 밖으로 넘어가지 않는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는 것으로 만족합니다.
이 교리는 우리에게 말할 수 없는 위로를 주는데, 이는 이 교리가 어떤 일도 우리에게 우연히 일어날 수 없고, 오직 우리의 은혜로우신 하늘 아버지의 명령으로만 일어난다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자애로운 아버지의 돌보심으로 우리를 살펴보시되, 그의 주권 아래 만물을 보존하시어, 우리의 머리털 하나도(머리털까지도 다 세어두셨기에), 또는 참새 한 마리도 우리 아버지의 뜻이 없이는 떨어지지 않도록 하십니다(마 10:29-30). 우리는 하나님께서 마귀들과 우리의 모든 원수를 통제하시므로 하나님의 허락과 뜻이 없이는 그들이 결코 우리를 해할 수 없다는 것을 알기에, 이러한 생각으로 우리는 안식을 얻습니다.
이런 이유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어떤 일에도 관여하지 않으시고 모든 것을 우연에 맡기신다고 주장하는 에피쿠로스 학파의 가증스러운 오류를 거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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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시되 흙으로 지으셨고 모든 면에서 하나님의 뜻을 따라 행할 수 있도록 하나님의 모양과 형상으로, 즉 그의 선하심과 의로우심, 또한 거룩한 형상으로 만들어졌음을 믿는다. 그러나 인간은 영광된 위치에 있음에도 그것을 깨닫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인간의 존귀함을 알지 못하여 자신을 스스로 사악한 죄악에 내던져 결국은 사단의 유혹에 넘어져 죽음과 저주의 상태에 빠졌음을 볼 수 있다. 왜냐하면 인간은 그가 받았던 생명의 계명들을 범했기 때문에 죄로 인해 참 생명이신 하나님께로부터 멀어졌고, 따라서 인간이 전적으로 부패해졌기 때문이다. 이렇게 됨으로 인간은 육체적으로나 영적으로 죽을 수밖에 없게 되었다. 인간이 모든 면에서 악해지고 잘못되어 부패함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받았던 그 놀라운 은혜들을 다 잃어버리고 그 중에 지극히 작은 부분만 남게 되었는데, 그러나 그것으로 인해 인간이 변명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성경이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요1:5)고 말씀한 바와 같이 우리 속에 비친 빛이 어두움으로 변해 버렸기 때문인데, 사도 요한은 여기에서 인간을 어두움으로 부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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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아담의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원죄가 모든 인간에게 내려졌음을 믿는다. 이것은 전적인 부패와 유전적인 질병으로서 심지어 모태에 있는 아이에게까지도 전염되어 온갖 종류의 죄악을 낳게 함으로 죄의 온상이 되었고 따라서 이 모든 죄악이 하나님 보시기에 너무나 천하고 혐오할 만한 것이라 모든 인간이 저주를 받기에 충분한 것이다. 이 모든 죄를 없앤다거나 멸절시킨다는 것은 불가능하며 심지어 세례를 받는 일로도 할 수가 없는데, 왜냐하면 죄란 마치 샘에서 물이 솟아나듯이 이 비참한 근원에서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비록 이 죄악이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는 진노를 받기에까지 전가된 것은 아니라 할지라도 이들이 죄사함을 받은 것은 오직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에 의해서일 뿐이다. 하나님의 자녀들이 죄악 속에서도 안일하게 거한다는 뜻이 아니라, 어떤 면에서는 이 타락으로 인하여 성도들은 이 사망의 육신 세계에서 구원을 받기 위해 탄식하며 갈망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따라서 우리는 죄란 단지 모방하는 데서 생겨난다고 주장하는 펠라기우스 학파의 잘못을 배격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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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아담의 후손이 그 첫 조상의 범죄로 인해서 타락되어 멸망에 빠졌다는 것과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그 모습, 즉 자비로우심과 공의로우심을 나타내 보이셨음을 믿는다. 자비롭다함은 하나님께서 인간의 어떤 노력과는 관계없이 하나님의 영원하고 불변하신 계획 속에서 우리의 주되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택함받은 모든 사람들을 이 파멸의 자리에서 구원하여 보존하시기 때문이요, 공의롭다 함은 그 외의 다른 모든 사람들을 타락과 파멸 속에서 그대로 살아가도록 내버려두심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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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가장 자비로우신 하나님께서 가장 놀라우신 지혜와 선하심으로, 인간이 육체적이며 영적인 사망에 빠져들어가 전적으로 비참한 지경에 이르렀음을 아시고 그 아들(여인의 후손으로 태어날)로 하여금 그 보좌를 떠나서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하고, 그 아들을 복되게 하실 것을 약속하시고 범죄한 인간일지라도 그를 기뻐하시고 위로해 주시는 이심을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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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의 거룩하신 선지자들의 입을 통하여 조상들에게 약속하신 바를 이르시되, 하나님의 영원하신 독생자를 정하신 때에 이 세상에 보내심으로, 참되신 인간이심에도 불구하고 죄는 없으신 채 종의 모습을 취하셔서 사람과 같이 되게 하심으로 하나님의 약속을 성취하심을 믿는다. 인간이 되신 것을 사람의 수단에 의해서가 아니라 성령의 능력의 은총을 입은 처녀 마리아이 몸을 통하여 이뤄진 것인데, 예수 그리스도는 육신에 있어서만 참 인간의 성품을 취하신 것이 아니라 참 인간의 영혼에 있어서도 그러하셨으므로 그는 참 사람이 되셨던 것이다. 인간이 육신만 범죄하여 타락한 것이 아니라 영혼도 타락하였으므로 예수께서는 인간의 이 두 본성을 회복시키기 위해서 육신과 영혼의 두 면을 모두 취해야만 하셨던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그리스도는 성모 마리아에게서 육신을 입고 오신 것을 부인하는 재침례파의 이단설에 대항하여) 그리스도께서 육신과 혈통을 취하시되 육신으로는 다윗의 후손이요, 다윗의 씨에서 난자요, 여인에게서 난 자로서 마리아의 태의 열매요, 다윗의 가지요, 이새의 뿌리에서 난 싹이요, 유다 자손에게서 생겨난 자요, 육신으로는 유다 자손이요, 아브라함의 씨이심을 믿는 바이다. 또한 우리는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아브라함의 씨에서 나게 하시고, 죄는 없으시되 모든 면에서 그 형제들과 같이 인간의 모습을 갖게 하신 것은 그 분이 진실로 우리의 임마누엘 되심, 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사실을 이루시기 위해서였음을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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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이런 의미에서 하나님의 아들의 인격이 인간의 성품과 구별될 수 없도록 연합되어 있음을 믿는다. 이 뜻은 하나님의 두 아들이 있다는 것과 두 인격이 있다는 것이 아니라 다만 두 성품이 한 사람 속에 연합되어 있다는 것이요, 여전히 그 성품은 그 자체의 구별된 성향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마치 신의 성품이 태초부터 우주에 충만했을 뿐, 무엇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 아닌 것처럼, 그리스도의 인성도 그 성품을 잃지 않고 유한한 인간의 본성을 지닌 채 참 인간의 모습으로 계셨던 것이다. 비록 그리스도께서 그의 부활하심으로 영생을 취하셨다 하더라도 인간 본성의 그 실재가 변화한 것이 아닌데, 이는 마치 그의 육신의 실재를 따라 우리의 구원과 부활이 이뤄질 것과 다를 바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이 두 본성들은 한 인격 속에서 매우 밀접하게 연합하여서, 심지어 그의 죽으심에 의해서도 두 본성이 구별될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그가 돌아가실 때에 아버지의 손에 자신을 맡긴 것은 그가 육신으로부터 떠나게 되는 참 인간의 마음을 지녔기 때문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곧 이 신의 본성은 심지어 그가 무덤에 있었을 때 조차라도 인간의 본성과 항상 연합되어 있었던 것이며,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그리스도께서 어린아이였을 때에도 늘 그의 마음 속에서 계셨던 것처럼, 비록 이런 사실은 분명하게 나타나 있지는 않으나, 늘 그 속에서 함께 계셨던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그 분께서 순전한 하나님이시며 동시에 순전한 인간이심을 고백한다. 순전한 하나님이라 함은 죽음을 이기신 그의 능력에 의해서의며, 순전한 인간이라 함은 그의 육신의 연약함을 따라 그가 우리를 위해서 죽으셨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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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완전한 자비와 공의를 가지신 하나님께서 불순종으로 인한 죄를 완전히 회복시키기 위하여, 죄의 대가로서 받는 가장 쓰라린 고통과 죽음을 맛보도록 하기 위해 그의 아들을 보내셨음을 믿는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그 아들을 통하여 공의로우심을 나타내 보이시되 아들에게 우리의 모든 죄악을 담당시키셨으며 죄로 인해 저주를 받아 마땅한 우리에게 자비로우심과 선하심을 쏟아 주시되 그 아들로 우리를 대신해 죽게 하시고 우리의 의로움을 위하여 그를 일으키셨음을 믿으며, 바로 그를 통하여 우리가 영원한 삶을 얻게 됨을 믿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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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아 영원한 대제사장으로 엄숙히 기름부음을 받으셨음을 믿으며, 또한 우리를 위해 자신을 십자가에 드림으로 아버지를 기쁘게하여 그 진노를 없이 하셨고, 앞서 선지자들이 예언했던 것처럼 우리의 죄를 씻어 주시기 위하여 보혈을 흘리셨음을 믿는다. (사53:5)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사53:7)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양과 털 깎는 자 앞에 잠잠한 양 같이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사53:12) 범죄자 중 하나로 헤아림을 입었음이라. 비록 처음에는 본디오 빌라도에 의해 무죄한 분으로 판결 받았으나 결국은 행악자로 정죄를 받으셨던 것이다.

따라서 우리의 죄악으로 인하여 받을 수밖에 없었던 무서운 형벌을 그의 영혼뿐만 아니라 육신으로도 짊어지신 채 불의한 인간이 감당할 수 없는 그 고통을 의로우신 그 분께서 보혈을 땅에 흘리심으로만이 이루어졌던 것이다. 그는 이렇게 부르짖으셨다. (마27:46) “나의 하나님,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 우리의 죄를 사해 주시기 위하여 그는 이렇게 고초를 당하셨던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도 바울이 말한 (빌3:7-8)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는 고백을 마땅히 하는 바인데, 바로 그의 아픔 속에서 우리는 온갖 안위를 얻게 되는 것이다. 단번에 희생이 되심으로 영원토록 온전케 된 바 바로 이 희생 제물이 되신 그리스도 외에는 하나님과 인간을 화목하게 할 수 있는 그 어떤 방법이나 길이 있을 수 없다. 바로 이런 이유로 해서 그는 하나님의 천사에 의하여 “예수”, 즉 구세주라고 불림을 받았는데, 이는 (마1:21)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라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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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이 놀라운 비밀스런 지식을 얻기 위하여 성령께서 우리의 마음 속에서 올바른 믿음을 밝히 보여주심을 믿는데, 이 믿음은 그가 마땅히 받으셔야 하는 바 그의 모든 공로를 받아들이며 그 분 외에는 그 어떤 것도 이를 대신할 수 없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다음의 둘 중의 하나, 즉 우리의 구원에 필요한 모든 것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이 아님을 믿든지, 또는 만일 모든 것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이라면 믿음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소유한 사람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구원을 얻었음을 믿든지 해야 할 것이다. 따라서 구원에 있어 그리스도만으로는 완전하지 않고 그 외에 무언가 더 필요한 것이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엄청난 신성 모독죄를 범하는 것인데, 왜냐하면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단지 절반의 구원자밖에 되지 못한다는 주장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도 바울이 고백한 대로 오직 믿음으로만 의롭게 되었다는, 또는 행위로서가 아니라 믿음으로만 의롭게 되었다는 말을 마땅히 하는 바이다. 그러나 좀더 분명히 말해서, 믿음이란 그 자체가 우리를 의롭게 한다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믿음이란 단지 하나의 방편일 뿐이요, 이 방편이 되는 믿음으로 우리는 그리스도를 우리의 의로움으로 받아들이게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는 그의 모든 공로를 우리에게 전가시켜 주셨으므로 그가 우리를 위해 행하신 모든 거룩한 사역들이 우리의 의로움이 되는 것이다. 따라서 믿음이란 그의 모든 공로 안에서 우리를 그와 교통하도록 해주는 도구인데 우리가 이 모든 공로를 받아들일 때에 이것은 우리를 모든 죄악에서 멀리해 주는 그 이상의 것이 될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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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구원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악을 씻어 주셨음으로 되어짐을 믿는데, 바로 여기에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함을 얻는 의미가 있는 것이다. 이것은 마치 다윗과 사도 바울이 가르쳐 준 바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그 행위와는 관계없이 의를 심어 주셨다고 선언함과 같은 것이다. 또한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죄의 은혜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값없이 우리를 의롭게 하셨다고 말한다.

그런 고로 우리는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고 우리 자신을 그 분 앞에서 낮추면서 우리의 본래의 모습을 늘 인식하며 이 은혜의 기초를 항상 굳게 붙잡고 나갈 것인데, 다시 말해서 우리 속에서는 그 어떤 신뢰할 만한 요소라든지 자랑거리가 없고, 다만 십자가에 돌아가신 그리스도의 순종하심을 의지하고 따르면서 그를 믿을 때 그리스도의 순종이 우리의 것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믿는 것이다. 이 진리는 우리의 모든 죄악을 사해 주시며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담대히 나가고자 하는 힘을 주기에 충분하며, 최초의 인간이었던 아담이 당황하여 무화과 잎으로 몸을 감추려고 했던 사실과는 달리 두려움이나 무서움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만일 우리 인간이 우리 자신이나 보잘 것 없는 다른 피조물들을 의지한 채 하나님 앞에 나간다면, 불행한 일이지만 우리는 마땅히 소멸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윗과 같이 기도를 해야만 할 것이다. (시143:2) “주의 종에게 심판을 행치마소서 주의 목전에는 의로운 인생이 하나도 없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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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배움으로써 또한 성령의 역사를 통하여 얻게 된 이 참된 신앙이 인간을 중생케하여 새로운 피조물로 변화시켜 인간으로 하여금 새로운 삶을 얻게하여 죄의 사슬에서 해방시켜 준다는 것을 믿는다. 그러므로 의롭다 창함을 받은 이 믿음 때문에 경건하고 거룩한 생활이 태만해져도 된다는 주장은 옳지 않으며, 반대로 경건하고 거룩한 생활이란 하나님을 사랑함으로 나타나는 생활태도가 아니라 자기 사랑에서나 형벌의 두려움에서 나오는 것이라는 주장 역시 그릇된 것이다. 따라서 인간에게서 이 거룩한 믿음이 열매를 맺지 못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인데, 왜냐하면 우리가 말하는 믿음이란 죽은 믿음이 아니라 성경에서 일컫는“사랑을 통하여 역사하는 믿음”이기 때문이요, 이것은 곧 하나님께서 말씀 가운데서 인간에게 명하신 실천하는 믿음인 것이다.

이 선한 일들은 마치 좋은 믿음의 뿌리에서 선한 열매가 나오듯이 하나님 보시기에 받으실 만한 착한 행위들로서, 이모든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인하여 거룩하게 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의롭게 하는 데 있어 이 선행들이 아무런 가치가 없는데, 왜냐하면 의롭다 칭함을 받는 것은 선을 행하기 전일지라도 오직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서만 되어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 선행(先行)되지 않고서는 그 어떤 인간의 행위도 선할 수 없는데, 그 이유는 좋은 나무 열매를 맺으려면 그 나무 자체가 우선 좋아야만 하기 때문인 것과 마찬가지다. 그러므로 우리가 선행을 하는 것은 결코 그것으로 공적을 쌓기 위함이 아니다(무엇으로 우리에게 공로가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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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율법의 의식이나 율법이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인해 끝났다는 것과 그 분명치 않았던 일들이 모두 성취되었다는 것을 믿는다. 따라서 율법의 참 진리와 그 실체는 이 모든 것의 완성자되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여전히 남아 있기는 하되, 이 율법의 의식을 지키는 일이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는 필요 없다고 믿는 바이다. 그러나 우리는 복음의 가르침을 확증시키도록 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뜻을 따라 그의 영광을 높이기 위한 생활을 규정해 나가도록 율법과 선지자들에게서 얻은 그 모든 증거들을 여전히 사용하는 바이다(율법의 제3용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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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우리 스스로가 하나님께로 나갈 수 없고, 다만 중보자되시고 우리를 돌보시는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이 하나님께로 갈 수 있음을 믿는다. 이 예수 그리스도는 성육(成肉)하심으로 한 인격 속에 신성과 인성을 모두 지닌 분으로서, 인간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고서는 결코 하나님께로 가까이 갈 수 없다. 이 분이야말로 그 거룩한 하나님의 엄위로우심에 접근하도록 해주신 분이심을 믿는다. 그러나 성부께서 그와 인간 사이에 세워 주신 중재자되신 예수 그리스도는 결코 그의 위엄으로써 우리에게 공포감을 주거나 우리 멋대로 다른 것을 찾도록 하지는 않으신다.

왜냐하면 하늘과 땅에 있는 그 어떤 피조물이라도 예수 그리스도보다 더 우리를 사랑하는 존재는 없으며, 예수 그리스도는 비록 “하나님의 본체”이시나 우리를 위해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빌2:7), 범사에 그 형제들과 같이 되셨던 것이다. 그러므로 만일 우리를 사랑하여 가까이 나아오고자 하는 분을 우리가 찾고자 한다면, 우리를 위해 자기 생명을 내버리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시고, 심지어 그에게 원수되었을 때라도 우리를 사랑하셨던 그 분 외에 어떤 다른 존재를 찾을 수 있겠는가? 따라서 능력과 권위를 지니신 분을 찾고자 한다면 “하나님의 오른편”에 앉으셨을 뿐만 아니라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받으신”분이 예수 그리스도 외에 누가 있을 수 있겠는가?

하나님의 사랑하는 아들 이 외에 그 누가 이 음성을 들을 수 있단 말인가?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욕되게 할 뿐 그를 영화롭게 하지 아니하며, 하나님의 사람들이 가르쳐 준 바를 행하지도 필요로 하지도 않으며, 기록한 말씀의 경계를 계속 거부하는 이 모든 것은 오직 불신앙으로 말미암는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우리의 무가치함을 변명해서는 안 될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은 공적에 근거해서가 아니라 주 예수 그리스도의 놀라우심과 그 보배로우심에 근거하여 드리는 것이며, 바로 이 예수 그리스도의 의로우심이 믿음으로 우리의 것이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도는 이와 같은 인간의 어리석은 두려움, 아니 더 분명하게 말해서 인간의 불신앙을 우리에게서 제거하기 위하여 다음과 같이 정당하게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저가 범사에 형제들과 같이 되심이 마땅하도다 이는 하나님의 일에 자비하고 충성된 대제사장이 되어 백성의 죄를 구속하려 하심이라. 자기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험 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시느니라”(히2:17-18)

또한 우리로 하여금 담대히 하나님께 나가도록 하기 위하여 다음과 같이 권면하고 있음을 본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큰 대제사장이 있으니 승천하신 자 곧 하나님 아들 예수시라 우리가 믿는 도리를 굳게 잡을지어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그러므로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히4:14-16)

또한 사도는 이렇게 외치고 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 우리가 마음에 뿌림을 받아 양심의 악을 깨닫고 몸을 맑은 물로 씻었으나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히10:19-22). 또한 “예수는 영원히 계시므로 그 제사 직분도 갈리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으니 이는 그가 항상 살아서 저희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히7:24-25)

무엇이 더 필요한 것인가? 그리스도께서는 스스로 이렇게 말씀하시지 않았던가?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요14:6). 하나님께서 기꺼이 그 아들을 우리에게 중보자로서 주신 것을 기뻐하셨다면, 우리가 다른 중보자를 얻고자 할 이유가 어디 있는 것인가? 그러므로 다른 중보자를 구한다거나, 그를 발견할 수 없다 하여 다른 중보자를 찾음으로 참 중보자되신 그리스도를 저버리는 일이 있어서는 결코 안 될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그 아들을 우리에게 내주실 때 우리가 죄인되었음을 이미 알고 계셨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명하심을 따라서, 마치 주께서 기도를 가르쳐주실 때에 그의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아버지께 구하면 다 이루어 주신다고 약속하신 것과 같이 오직 한 분의 중보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늘 아버지께 간구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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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어떤 보편적인 혹은 우주적인 교회, 다시 말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받고 그의 보혈로 죄씻음 받으며 성령으로 성화되어 인치심 받음을 믿는 진실한 그리스도인들의 거룩한 교회를 믿는다고 고백하는 바이다. 그리고 이 거룩한 교회는 순간적으로 비록 작아 보이고 인간들이 볼 때는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여김을 받는다 하더라도, 마치 아합왕의 시대와 같은 위급한 경우에라도 하나님께서 바알에게 무릎 꿇지 아니한 칠천명을 남겨 두셨던 것같이, 이 악한 세상에 대항할 수 있도록 하나님에 의하여 보호를 받으며 유지되는 것이다.

더욱이 이 거룩한 교회는 어떤 장소나 특정한 사람에 한정되거나 경계를 이루는, 또는 속박을 받는 것이 아니라 온 세계에 널리 퍼지는 것이요, 동시에 믿음의 힘에 의하여 동일한 성령 안에서 마음과 뜻을 모두어 하나로 뭉쳐야만 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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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이 거룩한 공회가 구원받은 사람들의 모임이요, 그 외에는 구원이 있을 수 없으므로, 그리스도인은 어떤 상태나 조건 속에 있든지 간에 이 거룩한 모임에서 벗어나서는 안 되며 그 스스로 이 모임의 구성원이 되어야만 한다는 사실과, 모든 그리스도인은 마땅히 이 공회에 모여서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믿는 바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교회가 하나가 되고 그들 스스로가 교회의 원리와 그 가르침에 따르며, 예수 그리스도의 명령에 복종하고 서로가 동일한 몸의 지체 역할을 하면서 하나님께서 각자에게 주신 은사를 따라 사랑으로 봉사하는 일을 담당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일이 더욱 효과적으로 이뤄지도록 하기 위하여, 비록 하나님께서 명하신 말씀이 국가의 행정 명령이나 칙령에 어긋나는 일이 있다 하더라도,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하나님께서 세워 주신 교회에서 스스로 그 구성원이 되어야 하며, 따라서 자신들을 교회에서 속하지 않는 사람들과 구별하는 것은 모든 믿는 자의 마땅히 행할바이다. 그러므로 같은 교회 내에서 신자들 사이에 구별을 한다는 것이나 또한 신자들끼리 화목을 이루지 못하는 것도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하는 행위가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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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마땅히 성실하고 주의 깊게 참 하나님의 교회가 무엇인가를 말씀을 통해 알아야만 한다고 믿는 바인데, 그 이유는 이 세상에 모든 이단도 스스로 교회라는 이름으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우리가 말하는 것은 위선자들, 비록 외형적으로는 교회 안에서 선한 성도들과 함께 존재하면서 실상은 참 교회의 요소가 아닌자들에 대하여 말하는 것이 아니다. 여기서 우리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스스로 교회라고 부르는 온갖 이단들로부터 참 교회의 하나됨이 반드시 구별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참 교회임을 알 수 있는 몇 가지 사실은 다음과 같다. 만일 복음의 순수한 교리가 전파되고, 그리스도에 의해 세워진 성례가 순수하게 이행되며, 교회의 가르침으로 인해 죄를 징벌(권징)하는 일이 일어난다면 이는 참 교회에 속하는 것이다. 요컨대, 모든 일이 참된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이뤄지며 동시에 말씀에 어긋나는 모든 일이 제거될 때,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유일한 머리되신 분으로 인정됨으로 그 누구도 이 분에게서 벗어날 권리가 없다는 사실을 인정할 때에야만 참 교회로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이다.

교회의 성도에 관하여 생각해 볼 때, 다음의 몇 가지로 인하여 그들이 그리스도인됨을 알 수 있다. 즉 믿음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유일한 구세주로 받아들인 후에 죄를 멀리 하며, 의를 따라 살고 참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며 모든 것을 참으면서 육체의 정욕을 십자가에 못 박는 삶을 살아갈 때에 그리스도인의 흔적을 갖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마치 허물이 전혀 없는 것처럼 오해해서는 안 된다. 다만 그리스도인들은 모든 생활에 있어서 성령을 힘입어 모든 죄악과 싸워나가면서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하여 모든 죄를 사해 주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과 죽으심, 그리고 고난당하심과 순종하심에 힘입어 살아가는 것이다.

거짓 교회란,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과 권위보다는 그들 스스로의 능력과 권위를 내세우면서 그리스도의 명령에 따르고자 하지 않는 교회이다. 또한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가르치신 말씀대로 성례를 시행치 않고 그들 스스로의 생각에 맡긴 채 말씀에서 무언가를 더하는데,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보다는 사람에게 더 의존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거룩하게 사는 자를 핍박하며, 그들의 죄와 욕심과 우상 숭배를 책망하는 자를 핍박하는 것이다. 이 두 가지 유형의 교회는 쉽게 알 수 있고 구별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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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참 교회가 주님께서 말씀 가운데에서 가르쳐 주신 그 영적인 형태에 의해 다스려져야만 한다는 것을 믿는다. 다시 말해서, 목사에 의해 하나님의 말씀이 강론되며 성례가 이뤄지고, 목사와 더불어 장로와 집사가 교회 회의를 구성하며, 이렇게 됨으로써 참 종교가 보존되며 모든 곳에서 진실한 가르침이 전파되고, 영적인 방법에 의하여 범죄자들이 징벌을 받으며, 구속받게 되는 것이다. 또한 가난한 자와 억눌린 자가 그들의 필요에 따라 구제 받고 안위를 얻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마치 사도 바울이 디모데서에서 기록한 바와 같이 믿음 있는 성도들이 뽑히게 될 때 교회 안에서는 모든 일이 선한 순서와 질서를 따라 이루어져 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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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따른 목사와 장로 그리고 집사가 주의 택함을 입어 하나님의 말씀이 지시해 주는 질서 속에서 교회의 정당한 선택에 의해 그 각자의 직무에 따라 뽑혀져야만 함을 믿는다. 그러므로 각자는 부당한 방법으로 처신할 것이 아니라 자신이 선택됨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때까지 기다려야만 할 것이다. 또한 택함 받은 소명에 대해 증거를 갖고, 이것이 주께로부터 받은 것임을 확신하고 명심해야 할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에 따른 목사는, 그가 어떤 형편에 있든지 간에 유일한 목자요 교회의 머리되신 그리스도를 섬기는 모든 목사들과 같이 동일한 힘과 능력을 가지는 것이다. 더욱이 하나님의 거룩한 질서가 파괴되거나 경솔히 여겨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맡은 목사와 교회의 장로들을 그 맡은 일을 위하여 높이 존경할 자로 여기고, 불평과 다툼과 논쟁이 없이 가능한 한 그들과 화평을 갖도록 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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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비록 교회를 다스리는 사람들이 교회를 질서있게 움직이기 위하여 만든 규칙과 질서들이 쓸모있고 유익하다 하더라도 그 모든 것은 유일한 주인이신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모든 규례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을 믿는다. 따라서 우리는 인간적인 모든 생각과 인간의 양심을 묶어 버리며 강요함으로써 하나님을 섬기도록 하는 그 어떤 인간적인 수단들을 배격하는 바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직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께 순종하도록 가르치며 돌봄으로 조화와 일치를 이루도록 하는 길만을 받아들인다. 바로 이 목적을 위해서 하나님의 말씀이 지시해주는 모든 가르침을 따라 징계하거나 다스리는 일이 필요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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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은혜로우신 하나님께서 우리의 연약함과 부족함을 미리 아시고 우리를 위해 성례를 제정하셔서 그의 약속하심에 이르기까지 인을 쳐주시며,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선함과 은혜로 약속해 주심으로 우리의 신앙을 일으켜 주시며 강하게 해 주심을 믿는다. 하나님께서는 복음의 말씀에 따라 우리에게 약속을 주시되, 두 가지 측면에서 즉 그의 기록된 말씀의 선언하심을 따라 그리고 그가 우리 속에서 역사하심을 따라 좋을 것을 주시는데, 이로써 하나님은 우리에게 내려주신 구원을 확증토록 하시는 것이다.

이런 것들은 내적이며 보이지 않는 것들에 대한 외적인 징표들인데, 이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성령의 능력으로 우리 속에 역사하는 것이다. 따라서 그 징표들은 우리를 기만하기 위한 속임수나 무의미한 것이 아닌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는 이 모든 것의 참된 주인이시오, 그가 없이는 일순간이라도 이 모든 것이 무의미하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다음의 두 성례에 만족하는데, 이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세례와 성찬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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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율법의 완성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보혈을 흘리시되 인간이 죄에 대한 속죄나 보상으로 마땅히 드려야 되는 그 피를 대신 흘려주심으로 모든 속죄를 이루셨음을 믿고 고백하는 바이다. 또한 우리는 그가 피흘려 주심으로 할례를 폐기하시고 그 대신에 세례를 규정하셨음을 믿는 바이다. 이 세례로서 우리가 그리스도에게 속하였음을 앎으로 다른 모든 사람이나 다른 종교들과 구별되어 하나님의 교회에 속하게 되는 것이며, 이로써 그를 영원토록 우리의 자비로우신 하나님이시오, 아버지이시라고 증거하는 것이다.

이러므로 주께서는 물론 세례를 받고자 하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명하시기를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도록 하셨는데, 이것이 뜻하는 것은 마치 사람이 물 속에 들어가서 몸의 더러운 것을 씻어내듯이, 물뿌림의 세례를 받음으로 성령의 능력에 의해 그리스도의 피가 그 영혼을 내적으로 깨끗케 하여 죄를 씻어줌으로, 우리들로 하여금 진노의 자식에서 하나님의 자녀들로 중생케 하는 것이다.

이것은 외적인 물에 의해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의 보혈을 받아 되는 것이다. 이것은 마치 사탄과 같은 바로의 폭정을 모면하기 위하여 건너가지 않으면 안 되었던 홍해와 같은 것인데, 이로써 우리가 영적인 가나안 땅에 들어갈 수 있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목사는 그 직무에 따라 주께서 의미를 부여하신 이 가시적(可視的)인 성례를 행하는 것인데, 이는 은사요 눈에 보이는 은혜로써, 세례를 통하여 죄를 씻고 깨끗케 함으로 우리 영혼의 추하고 불의한 모든 것을 정결케 하는 것이다. 또한 우리의 마음을 새롭게 하고 모든 위로로 우리 마음을 채우며, 우리를 향하신 아버지의 선하심을 받아들이며, 새 사람으로 옷입어 과거의 모든 행위와 더불어 옛 사람을 벗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간절한 마음으로 영생을 얻고자 하는 사람은 세례를 받아야 하며 일단 세례를 받은 사람은 또 받을 필요가 없는데, 이는 우리가 두 번 태어날 수 없는 것과 같은 것이다. 또한 세례는 물이 우리에게 부어지고 우리가 이를 받는 순간에만 유용한 것이 아니라 우리의 전생애를 통하여 효험이 있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재세례파의 잘못을 배격한다. 그들은 한 번 받은 세례에 만족하지 않고 더구나 유아 세례를 반대한다. 그러나 믿는 자들은 마치 이스라엘 자손들이 어린아이들에게 내려진 동일한 약속에 근거하여 할례를 받았듯이 계약의 징표로서 세례를 받아야 마땅한 것이다. 진실로 그리스도께서는 어른들을 위해서 뿐만 아니라 어린아이들의 죄씻음을 위해서도 그의 보혈을 흘려주셨던 것이다.

그런 고로 어린아이들도 그들이 태어나자마자 주께서 명하신 대로, 마치 희생 제물이 되는 어린양과 같이,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으심에 참여해야 마땅하다. 이로써 그리스도께서 그들을 위해 표적과 성례를 받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더 나아가 할례가 유대인들에게 행해졌듯이 세례는 우리 자손들에게 행해져야 마땅한 것이다. 바로 이런 이유로 사도 바울은 세례를 “그리스도의 할례”라고 불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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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이미 중생함을 얻고 교회의 지체가 된 사람들을 기르치시고 도우시기 위하여 구세주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만찬을 제정해 주셨음을 믿고 고백하는 바이다. 중생한 성도들에게는 다음의 두 가지의 생활면을 갖게 되는데, 첫째는 육신적이며 일시적인 것이다. 이는 태어날 때부터 갖는 것이요 모든 사람에게 공통적인 것이다. 둘째로는 영적이며 영원한 것인데 이는 중생할 때 갖게 되는 것이요, 그리스도의 몸에 참여하는 복음의 말씀에 의하여 효력을 얻게 되는 것이다.

이런 생활은 누구에게나 주어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택함받은 자에게만 될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육체와 이 세상의 삶을 위하여 일용할 양식을 우리에게 내려주시는데 이것은 생활 그 자체로서 누구에게나 있어야 되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신자들이 지녀야 되는 영적이며 영원한 삶을 영위하도록 하늘에서 내려온 생명의 양식을 우리에게 주신다. 이는 곧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하는 것으로서 우리가 그를 취할 때 모든 성도들이 영적인 생명을 공급받고 힘을 얻는다. 다시 말해서 신자들이 믿음으로 그리스도를 인정하고 그를 영접할 때에 그렇게 된다는 것이다.

주님께서는 이 영적이며 신령한 양식을 보여주시기 위하여 이 세상의 가시적인 제도를 세우셨는데, 그의 몸을 상징하는 떡과 그의 피를 상징하는 포도주가 그것이다. 이것은 마치 우리가 이 예식을 잘 행하되 육신의 손과 입을 통하여 먹고 마심으로 우리의 생명이 공급을 받듯이, 믿음으로 우리의 영혼의 유일한 구세주이신 그리스도의 참 몸과 피를 취함으로 영적 생명을 유지해 나갈 수 있는 것이다.

마치 성령의 역사가 인간에게는 감추어져 있어서 깨닫기 어렵듯이, 이 성례의 참 의미가 우리의 이해를 초월해 깨닫기가 어렵기는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성례를 헛되이 행치 않도록 명령하셨다. 그는 우리 속에서 이 거룩한 징표들을 통하여 그의 사역을 이루고 계신다. 우리가 먹고 마시는 것이 그리스도께서 가지셨던 몸과 피라고 말하는 것이 잘못된 것은 아니지만,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우리가 취하는 수단은 육신의 입을 통해서가 아니라 믿음을 통한 영에 의해서인 것이다.

따라서 그리스도께서 비록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오른편에 앉아 계시기는 하지만, 그는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그와 하나가 되게 하시는 분이시다. 이 예식은 영적인 식탁에서 이뤄지는데, 그리스도께서는 그 모든 은혜로써 우리와 교통하시며 그를 즐거워하도록 할 뿐만 아니라 그의 고난과 죽으심의 공로를 또한 기꺼이 얻도록 하신다. 이것은 그의 살을 취함으로써 영양을 공급받고 든든해져서 우리의 가련하고 쓸쓸한 영혼이 위로를 받도록 함이요, 그의 피를 마심으로써 영혼을 소생시키고 새롭게 함에 있는 것이다.

더 나아가, 이 성례식이 비록 의미 심장한 일과 연관되어 있기는 하지만 이 두 예식을 모든 사람이 다 받을 수는 없다. 진실로 경건치 않은 이들은 이 예식을 행한다 하더라도, 이 성례식의 참 진리를 받을 수 없는데, 이는 마치 유다와 마술사 시몬이 이 예식을 좇아 행하기는 했으나 이 예식의 참 의미가 되시며 모든 믿는 자와 하나가 되시는 그리스도를 영접하지 못한 것과 같다.

끝으로 우리가 성례식을 성도가 모인 곳에서 행하되 겸손과 경외심을 가지고 하는 것은, 우리 구세주인신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엄숙히 기념하고 감사하면서 동시에 기독교의 신앙을 고백하는 일이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먼저 자기를 잘 살피지 않고 이 예식에 참여하는 자들은 이 떡과 잔을 마심으로 스스로 심판에 이르게 될 뿐이다. 요컨대 우리가 이 거룩한 예식을 행할 때는 하나님과 이웃을 뜨겁게 사랑하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성례식에 있어 인간이 조작하여 덧붙인 모든 조잡하고 그릇된 생각들을 불경건한 것으로 배격하는 바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와 사도들이 우리에게 가르쳐준 그 예식의 규정에 만족하며, 그들이 말한 바로 즉 그 방식대로 행해야만 한다는 것을 확증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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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은혜로우신 하나님께서 인간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왕과 군주와 행정 장관을 세우셨음을 믿는데, 이는 세상이 특정한 법과 정책에 의해 다스려짐으로 인간의 방종이 제어되고 만사가 선한 질서와 순서에 따라 움직여지도록 하기 위함이다. 그들의 직무는 국가의 안녕에 관심을 갖고 이를 보호할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의 왕국을 이뤄나가도록 하는 것이므로 이 신성한 직무를 잘 지켜 나가야 할 것이다. 따라서 그들은 어디서나 복음서의 말씀이 전해지도록 옹호해야 하는데, 이럼으로써 주께서 말씀 가운데에 명하신 대로 누구나 하나님을 높이고 경배하게 하는 것이다.

더 나아가 형편과 자격 또는 조건이 어떠하든지 간에 국가를 다스려 나가는 자들에게 순종하는 것은 주어진 의무이다. 세금을 내며 하나님의 말씀에 그릇되지 않는 모든 일에 있어서 그들을 높이고 존경하며 순종해야 할 것이다. 하나님께 그 모든 길에 있어서 그들을 다스리시고 인도하시도록 기도해야 하는데, 이러므로 “모든 경건과 단정한 중에 고요하고 평안한 생활”(딤전2:2)을 하게 되는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권세자요 통치자들을 배격하고 공의를 무시하며 재산의 공유를 내세워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세우신 선한 질서와 순서를 깨뜨리는 재세례파와 그 외의 거짓을 선동하는 자들을 철저히 배격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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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으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주께서 약속하신 때가 이르고 구원받은 수가 차게 되면, 우리의 주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마치 하늘로 승천하셨듯이, 놀라운 영광과 위엄으로 하늘로부터 이 세상에 가시적인 모습으로 강림하시되,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는 심판주로, 또한 옛 세상을 불과 화염으로 사르셔서 깨끗케 하시는 분으로 오실 것을 믿는다.

그 때에는 모든 개개인, 즉 남녀 노소 할 것 없이 태초부터 지금까지의 모든 사람들이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 소리에 의해 놀라운 심판주 앞에 서게 될 것이다. 모든 죽은 자들은 무덤에서 일으킴을 받아 그 영혼과 몸이 연합되어 예전에 살던 모습으로 되어질 것이다. 살아 있는 자들에 관해 볼 때, 그들은 죽은 자들과는 달리 죽음을 보지 않은 채 썩이질 모습에서 썩지 않을 빛나는 모습으로 변화될 것이다. 그 때에 죽은 자들이 이 땅위에서 선악간에 행한 그들의 행위를 따라 책들이 펴지고 책들이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게 될 것이다. 진실로 모든 이들은 그들이 말한 무익한 말들, 즉 오락의 말이나 농담조차 판단을 받게 될 것이며, 인간의 말한 것이나 위선조차 밝히 드러내어 보이게 될 것이다.

따라서 심판은 악하고 불경건한 이들에게는 두렵고 떨리는 것이며 택함받은 의인들에게는 소망과 위로가 되는 것인데, 그 이유는 그 때에야 의로운 자들에게 완전한 구원이 이뤄지며 그들이 수고한 모든 노력과 상급을 받게 되기 때문이다. 또한 그들의 무죄가 모든 이들에게 알려질 것이요 사악한 자들에게 임할 하나님의 무서운 진노를 보게 될 것인데, 이 사악한 자들은 모두가 이 세상에서 무죄한 자들을 박해하고 억누르고 괴롭힌 사람들로서, 그들의 양심의 증거를 따라 심판을 받고 죽지는 아니하되 악한 자들과 악한 천사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원한 불 속에서 고통을 받게 될 것이다.

그러나 반대로, 선택된 신실한 성도들은 영광과 존귀로 관쓰임을 받을 것이요, 하나님의 아들은 아버지와 그 택함받은 천사들 앞에서 성도들의 이름을 밝히게 되고,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이 씻기움을 받고, 이 세상에서 있을 때 많은 재판관과 통치자들에 의해 이단이요 불경스럽다고 정죄받은 성도들의 주장이 그 때에는 하나님의 아들의 주장으로 되어질 것이다. 따라서 주께서는 은혜의 선물로서 인간의 생각으로는 도저히 해볼 수 없는 놀라운 영광을 성도들에게 내려 주실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약속을 마음껏 즐길 수 있기 위하여 이 놀라운 날을 간절한 마음으로 고대하는 바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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